깡촌에 살았던 어린 날, 제대로 된 썰매가 없어 비료 포대 안에 짚을 넣고는 뒷산으로 또는 앞산에 올라 썰매를 탔다. 나무와 부딪칠 뻔 한 적도 있고 엉뚱한 곳으로 내려가다 넘어진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썰매를 타는 즐거움은 겨울이 주는 선물이었다. 이제 도시화 되고 산은 한쪽으로 밀려난 듯하다. 산이 있고 언덕이 있어도 썰매를 탈 장소를 찾는 것이 내 어린 날보다 여의치 않은 지금이다. 지금은 모두 도시 한 쪽에 만들어진 썰매장에서 돈을 지불하고 썰매를 탄다.
그림책 '빨간 썰매’를 출간하고.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 썰매를 탔던 추억
2022년 12월 10일 그림책 ‘빨간 썰매’가 집에 도착했다. 썰매를 끌고 무작정 올라간 눈 덮인 언덕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세명대의 산자락에서, 넓은 비행장으로 향하는 비탈진 길에서 조카와 썰매를 탔던 모든 순간의 추억으로 만들게 된 책이 ‘빨간 썰매’이다. 눈온 날이면 유치원 가는 길에 포근한 눈 위에 누워 천사의 날개를 만들던 아이. 밖으로 나가 눈을 맞거나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 아이와 함께하다 보면 나도 눈을 만지게 되고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지고 썰매를 타고 싶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눈이 오면 길 걱정을 하고, 추워서 귀찮고 다 번거롭기도 한데 아이는 지칠 줄도 모르고 놀고 싶어 한다. 웃음이 많고 어느 아이나 그렇겠지만 놀기를 좋아하는 7살, 8살, 9살 ….눈 온 날의 아이는 꼭 강아지 같다. 어린날의 행복한 추억은 어른이 되고 많은일에 부대끼며 힘들때 좋은 영양제 역활을 한다고 나는 믿는다. 추억 만들어주기도 있었지만, 신나게 웃는 아이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도 눈이 쌓인 밖으로 썰매를 들고 나간다. 썰매가 잘 나가지 않는 평지에서 그것을 끌고가면서도, 별 속도감도 없는 완만한 내리막길에서도 아이는 재미있어 한다. 언덕을 내려오며 지르는 신나는 비명은 잠깐. 다시 낑낑거리며 올라가면서도 아이는 함박웃음이다. 그 웃음이 나를 중독시킨 듯 나도 덩달아 눈 쌓인 날을 즐겼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앞,뒤 산으로 둘러싸인 산동네에서 살고 있다. 오늘처럼 눈이 소복히 내리는 날이면, 나의 어설픈 준비에도 즐겁게 썰매를 탔던 아이와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 그 꼬마가 내 옆에 있다면 우리는 썰매를 들고 저 앞에 보이는 앞산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썰매를 타고 달리다 휙-하고 날 수 있다면.
인공 썰매장으로 가지 않는 한 높은 언덕에서 쏜살같이 내려오는 빠른 썰매타기는 힘들 것이다. 책에서처럼 산에서 내려오고 올라가며 오르락내리락 썰매를 타는 것이 어찌 현실에서 가능하겠는가. 그것이 산이 아닌 언덕이라 해도 그런 언덕은 주변에 없다.
썰매 타기 좋은 곳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책에서처럼 슈웅-하고 썰매를 타고 달리고 달려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곳! 까지는 아닐지라도 내 어린 날 탔던 그런 정도의 산자락을 찾았었다. 그런 곳을 찾지 못해서 그런 세계를 책 속에 담았나 보다. 저 아이가 끝 간 데 없이 멀리까지 썰매를 타고, 더 즐겁게, 더욱더 신나는 감정을 경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 그래서 그런 기분을, 그런 신나는 경험을 책 속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도 아니고, 20장의 그림 만으로 과연 그런 즐거운 쾌감을 아이들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나는 작업실 여기저기 겨울사진을 붙여놓고 봄, 여름, 가을동안 겨울그림을 그리며 보넸다.


그림책 그림을 그리다.
더미 북을 출판사에 보냈을 때는 간단한 드로잉에 컴퓨터로 대충 색을 입힌 상태의 그림이었다. 출판사는 내 더미북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보인다고 긍정적으로 보아주었다. 작은 더미 북과 달리 큰 사이즈의 원화를 그리려 하니 초기에는 뭔가 잘 풀리지 않았다. 원화라고 생각해서인지 자유분방하던 선의 느낌도 잘 살지 않았고 색을 입히는 방법도 물감으로 칠해보고 판화처럼 찍어보고 아이패드로도 작업해보며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나갔다.
겨울 하늘과 눈 덮인 배경은 컴퓨터로 작업했다. 자세히 보면 컴퓨터 모니터의 픽셀(점)같은 것들이 촘촘히 모여있기도 하고 조금은 헐겁게 모여있는 곳도 보일 것이다. 공기 중의 수많은 입자들이 보일 듯 말듯한 느낌으로 겨울날의 공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등장하는 케릭터는 썰매를 타는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4B보다 더 진하고 거친 8B연필로 드로잉하였다. 그것이 움직임에 대한 생동감을 더 강조한다고 생각했고 콩테라는 재료와도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케릭터 외의 배경은 콩테로 그렸다.

2권의 ‘빨간 썰매’가 출간되었다.
책을 받고 3일 정도 지난 후,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내 책보다 먼저 출간된 다른 그림책 ‘빨간 썰매’가 제일 위에 올라왔다. 제목이 똑같은 책이 출간되리라고 생각도 안 했기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내 책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책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라는 홍보와 함께 산타클로스의 썰매가 되기 위한 빨간 썰매의 아름다운 도전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독자분들이 책에 대한 서평을 올렸는지 네이버에는 그 책에 대한 서평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다시 검색하니 좀 아래쪽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책이 경쟁한다?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고 사례를 들은 적도 없었기에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했다. 출판사와 상의를 해봐야 하나? 하고 고민할 때 쯤 출판사에서 문자가 왔다. 연합뉴스에 소개된 4권의 겨울 그림책 중, 내 책 ‘빨간 썰매’도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뉴스를 보지는 못했지만 많이 위로가 되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많은 아이들이 내 책을 보며 썰매를 타는 생생한 즐거움을 느끼면 좋겠다. 책 속의 아이와 다람쥐와 토끼와 흰곰이 신나게 썰매를 타는 그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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